봉준호 감독의 미키 17은 단순한 SF 스릴러를 넘어, 우리 존재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다. 영화는 매번 죽음과 재탄생을 반복하는 주인공 미키를 통해, 우리가 흔히 당연하게 여기는 ‘자아’라는 개념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이 작품은 고대 철학의 상징적 역설인 테세우스의 배를 바탕으로, 인간의 정체성이 단순한 물질적 연속이 아니라, 기억과 서사로 엮인 심리적 연속임을 화려하고도 날카롭게 그려낸다.
불멸의 자아를 향한 고독한 질문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관객은 미키가 겪는 극한의 생존 체험과 함께 ‘내가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빠져들게 된다. 미키는 복제된 몸으로 끊임없이 부활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그의 기억과 정서는 미묘하게 변해간다.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한번도 멈추지 않는 죽음의 반복 속에서, 과연 ‘진짜 나’라는 것은 존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영화 내내, 스크린 가득 퍼지는 어두운 색채와 음산한 사운드트랙 속에서 점점 더 짙어지며, 관객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테세우스의 배와 미키의 복제: 자아의 해체와 재구성
고대 철학자 플루타르코스가 제시한 테세우스의 배 역설은 “모든 부품이 교체되었을 때 그 배는 여전히 원래의 배인가?”라는 질문으로 우리를 사유의 장으로 초대한다. 미키 17은 이 철학적 딜레마를 극한의 SF적 상상력으로 구현한다.
미키는 자신의 육체가 한 번씩 완전히 교체되는 동시에, 지난 기억의 파편들을 이어받으며 ‘자아’를 재구성한다. 이 과정은 마치 낡은 판자가 하나하나 교체되면서도 그 배가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로 인정되는 것처럼, 미키라는 존재의 근본적인 동일성을 유지하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매번의 부활은 새로운 미키를 탄생시키며, 전과는 미묘하게 다른 감정과 경험을 쌓아간다. 영화는 이 이중적 구조를 통해, 정체성이란 결코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지속되는 변화와 재해석의 산물임을 강렬하게 전달한다.
철학적 성찰
봉준호 감독 특유의 시각적 연출과 서사 구성은 미키 17을 단순한 스토리 이상의 예술작품으로 만든다. 장면 하나하나에는 정교한 상징과 메타포가 숨어 있다.
예를 들어, 미키가 복제되기 직전과 후의 대비되는 장면들은, 물리적 형태는 변했지만 내면의 자아는 잔잔하게 이어진다는 점을 암시한다. 촬영 기법과 조명, 그리고 카메라의 느린 패닝은 관객으로 하여금 미키의 눈빛 속에 스며드는 깊은 슬픔과 고독을 함께 느끼게 하며, 한편으로는 그가 마주하는 존재론적 공허함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또한, 영화 곳곳에 삽입된 회상 장면과 몽타주 시퀀스는, 미키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아우르는 내러티브 자아를 재구성하는 모습을 시적으로 보여준다. 이 내러티브는 단순히 한 인물의 이야기만을 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겪는 ‘나’의 변모와 재해석을 은유하는 듯하다. 관객은 미키의 고통과 혼란 속에서 자신을 투영하며, “과연 나는 어떤 순간에 내 진정한 자아를 잃어버리는가?”라는 물음을 스스로 던지게 된다.
인간 정체성과 윤리적 딜레마
미키 17은 기술의 발전과 복제라는 미래적 상상이 가져올 윤리적 문제에도 강렬한 질문을 던진다. 영화 속에서 미키는 단순한 ‘복제인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가 반복되는 죽음과 부활을 겪으며 살아가는 과정은, 단순히 한 인물이 여러 번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윤리적 논쟁을 환기시킨다.
미키의 복제 과정은, 마치 인간의 몸이 세포 단위로 계속해서 재생되는 현대 생물학적 사실을 과장한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동시에 ‘자아의 고유성’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 만약 미키가 매번 달라진 자신을 받아들인다면, 그에게 ‘진짜 나’란 무엇이며, 누구의 소유가 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영화 속 사회에서 미키를 단순한 소모품처럼 다루는 장면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회는 그를 대체 가능한 존재로 취급하지만, 미키 자신은 각 복제본마다 미묘한 감정과 기억의 차이를 가지고 있기에, 이 모든 ‘나’들이 단순히 동일한 존재로 환원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윤리적 딜레마는 우리에게도 깊은 질문을 던진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복제가 가능해진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기인하며, 그 소중함은 어떻게 보장되어야 하는가? 미키의 이야기는 이 질문을 관객에게 강렬하게 각인시키며, 복제 기술이 가져올 사회적 불평등과 인간다움의 상실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결론
미키 17은 단순한 액션과 스릴을 넘어, 철학적 상상력과 감각적인 미학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영화다. 테세우스의 배를 통한 자아의 문제, 그리고 복제된 몸 속에서 이어지는 심리적 연속성은, 영화 전체에 걸쳐 관객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내가 진짜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 속에 있는가?”
봉준호 감독은 미키의 서사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정체성이란 단순한 외형이나 물리적 연속이 아니라, 내면의 기억과 감정, 그리고 그것을 이어가는 서사적 힘임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한 개인의 존재가 얼마나 유동적이며, 동시에 얼마나 강렬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날카롭게 포착해내며, 그 과정에서 우리의 인간다움과 윤리적 가치를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만든다.
결국, 미키 17은 관객에게 단순한 오락 이상의 메시지를 남긴다. 그것은 바로 “나”라는 퍼즐을 이루는 수많은 조각들이 때로는 해체되고 재조립되면서도, 그 자리에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는 진정한 정체성의 흔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어두운 상영관을 나서면서, 머릿속 한구석에 깊은 여운과 함께 자신만의 ‘자아’에 대해 다시금 묻게 되는 순간, 그때 우리는 비로소 미키 17이 던진 근원적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잠기게 된다.
테세우스의 배와 현대 철학: 데리다, 퍼핏, 데닛의 관점
테세우스의 배 논제는 정체성(identity)의 지속성에 대한 유명한 역설입니다. 고대 철학자 플루타르코스가 제기한 이 사고실험에서, 영웅 테세우스의 배의 부품을 하나씩 새 것으로 교체하면 결국 모든 부품이 바뀌게 되는데, 그때도 여전히 같은 배라고 볼 수 있는지 묻습니다. 또 교체된 오래된 부품들을 모아 두 번째 배를 조립한다면 어느 쪽이 진정한 ‘테세우스의 배’인지도 문제. 이 역설은 사물이나 인간의 정체성이 시간에 걸쳐 어떻게 유지되는가를 질문하며, 현대 철학자들도 각자의 관점에서 이를 해석해왔습니다. 아래에서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데릭 퍼핏(Derek Parfit),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 세 사람이 이 역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와, 각각의 철학적 입장(해체주의, 개인 정체성 이론, 인지과학)이 이 논의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들의 이론 사이의 주요 공통점과 차이점도 정리합니다.
자크 데리다: 해체주의와 정체성의 모호함
자크 데리다는 전통 형이상학의 개념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해체주의(deconstruction)를 제시하면서, 정체성 개념 또한 고정적이지 않음을 강조했습니다. 데리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의 제1원리인 A는 A이다(동일률)을 문제삼아, 어떤 대상도 온전히 자기 동일적이지 않고 항상 차이를 내포한다고 보았습니다 예컨대 그는 플라톤의 저작에 나오는 코라(chôra) 개념을 차용하여, 어떤 것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 이는 고대 철학자 헤라클리토스가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한 역설과 통하는데, 헤라클리토스의 강에서 물은 늘 새롭게 흐르지만 강의 이름은 지속되듯이, 대상의 정체성도 영속적인 실체라기보다 흐름 속에서 잠정적으로 구성된 것입니다 . 데리다의 관점에서 보면 테세우스의 배 역시 처음부터 자기 동일적인 실체가 아니라 시간 속의 차이들과 흔적들로 이루어진 개념입니다. 배의 널빤지를 하나씩 교체하는 과정에서 배는 매 순간 이전과 같으면서도 다르고, 새로운 부품들이 추가됨에 따라 원래의 배와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긴장을 드러냅니다. 결국 “같은 배인가, 아닌가”라는 이분법적 질문 자체가 해체됩니다. 데리다는 이러한 역설을 통해 정체성은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차이에 의해 유지되는 효과임을 보여준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 요컨대 데리다에게 테세우스의 배는 정체성의 불안정성을 드러내는 예로서, 대상의 동일성은 항상 차이(difference)와 지연(différance) 속에서만 성립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데릭 퍼핏: 개인 정체성과 심리적 연속성
데릭 퍼핏은 현대 분석철학에서 개인 정체성(personal identity) 문제를 심도 있게 탐구한 철학자로, 테세우스의 배 역설과 유사한 사고실험들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계속해서 같은 존재인가”를 질문했습니다. 퍼핏은 저서 《이유와 사람들(Reasons and Persons)》 등에서 텔레포터 순간이동 장치 이야기나 두뇌 반구 분할 같은 사례를 활용했는데, 이는 사람에게 테세우스의 배 문제를 적용한 것과 같습니다 . 예를 들어 퍼핏의 “텔레포터 역설”에서는 기계가 한 사람의 모든 정보를 스캔한 뒤 그 몸을 파괴하고, 같은 정보를 이용해 다른 장소에서 완전히 동일한 몸을 만들어냅니다. 이때 새로 만들어진 사람이 원래와 동일인인지 묻는 것이죠. 퍼핏의 결론은 놀랍게도 정체성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 그는 *한 개인을 일정 기간 후의 자신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것은 물질적 연속성(같은 몸)*이 아니라 심리적 연속성(psychological continuity)이라고 주장합니다 . 심리적 연속성이란 기억, 성격, 의도 등 정신 생활의 연속성을 가리키는데, 이는 이론적으로 하나의 현재 자아가 미래에 여러 자아로 분기할 수도 있다고 퍼핏은 지적합니다 . 실제로 퍼핏은 뇌가 좌우 두 반구로 나뉘어 두 개의 새로운 신체에 이식되는 “분열(fission)” 사례를 상상했습니다. 이 경우 두 명의 생존자가 모두 원래 사람의 기억과 성격을 이어받게 되는데, 논리적으로 한 사람이 둘이 될 수는 없으므로 원래의 동일성은 소멸합니다 . 그러나 퍼핏은 죽음과 달리, 그 두 사람이 모두 원래 자신과 연속성을 갖추고 살아있기 때문에 *“사실상 내가 살아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두 명 중 어떤이가 “진짜”인지 결정하는 게 아니라, 원래 자아의 심리적 상태가 이어졌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요컨대 퍼핏은 정체성(동일한 사람인가)이라는 질문보다 생존(survival)이나 연속성을 더 중시하며, 어떤 연속성이 끊기지 않았다면 비록 동일성이 애매해져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봅니다 . 테세우스의 배 문제를 퍼핏식으로 해석하면, 부품을 교체한 배와 옛 부품으로 재조립한 배가 둘 다 원래 배와 일정한 연속성을 가진다면 어느 하나만 “진짜”라고 할 근거는 없다는 겁니다. 엄밀한 논리로는 하나의 정체성이 둘로 갈라질 수 없기에 원래 배와 똑같은 배는 없다고 해야겠지만, 퍼핏의 견해에 따르면 정체성은 실체적 사실이라기보다 선택이나 관습의 문제에 가깝습니다. 결국 그는 테세우스의 배 역설이 개인 정체성의 임의성을 보여준다고 보며, 동일한지 여부를 집착하기보다는 무엇이 연속성을 부여하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대니얼 데닛: 인지과학과 내러티브 정체성
대니얼 데닛은 철학자이자 인지과학자로서 마음과 자아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며, 테세우스의 배 문제를 정보 및 서사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데닛은 전통적인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하며 인간의 자아를 두뇌가 만들어낸 가상의 산물로 봅니다 . 그는 대표적인 논문 〈자아는 서사적 무게중심이다〉(The Self as a Center of Narrative Gravity)에서 자아(self)를 일종의 “서사적 중심(narrative center)”에 비유했습니다. 우리의 두뇌는 끊임없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버전으로 써 내려가는데, 그렇게 생성되고 수정되는 수많은 ‘초안(drafts)’ 가운데 일관된 이야기 하나가 추출되어 “나”라는 허구적 일체감을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물리학에서 무게중심이 실제 물체의 한 부분이 아니라 여러 힘의 균형점이듯, 우리의 자아도 뇌가 편의상 만들어낸 서사적 균형점일 뿐이라는 설명입니다 . 데닛의 관점에서는 어떤 대상이나 사람의 정체성도 이러한 서사적 구성물로 이해됩니다. 테세우스의 배의 경우, 사람들은 *“이 배는 테세우스가 탔던 바로 그 배”*라는 이야기와 기능을 계속 이어가기 때문에 정체성이 유지됩니다. 비록 물질적 구성은 완전히 바뀌었어도, 배의 이름과 역할, 역사가 연속되기에 우리는 심리적으로 같은 배로 간주하는 것이죠. 이는 데닛이 말하는 “내러티브가 부여하는 정체성”과 부합합니다. 즉, 정체성은 물질의 동일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관한 정보와 기억의 지속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데닛은 자신의 SF 단편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Where Am I?)〉에서도 뇌와 몸을 분리시키는 설정을 통해, 어느 쪽이 진짜 나인가를 고민하게 만들었는데, 결국 결론은 자아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여러 구성 요소가 만들어낸 이야기상의 주인공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데닛의 인지과학적 접근은 테세우스의 배 역설을 뇌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재해석해 줍니다. 우리는 사물이든 자신이든, 변화 속에서도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로 묶어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이야기(서사)가 유지되는 한 정체성이 유지되었다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 결국 데닛에게 테세우스의 배의 정체성 문제는 인지적/실용적 관점에서 “우리가 그 배에 대해 일관된 서사를 유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환원됩니다. 배의 부품이 모두 바뀌어도 사람들이 그것을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로 부른다면, 그것이 곧 정체성의 지속이라는 것입니다.
이론 간 비교: 공통점과 차이점
데리다, 퍼핏, 데닛은 각기 다른 철학적 전통에 속하지만, 테세우스의 배 역설을 통해 공통적으로 전통적 정체성 개념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세 사람 모두 어떤 대상이 시간에 따라 완전히 동일한 채로 남는다는 직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공통점을 보자면, 이들은 모두 본질적이거나 불변하는 자아/정체성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최소한 회의합니다. 데리다는 정체성이 완결된 실체가 아니라 차이의 놀이 속에 나타나는 효과라고 보고, 퍼핏은 영속하는 불멸의 자아란 없으며 우리의 동일성은 사실 심리적 연속성의 산물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 데닛 역시 자아는 뇌가 만든 허구라고 보면서 본질적인 자기 동일성을 거부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정체성을 절대적인 것이라기보다 상대적이거나 구성적인 것으로 취급합니다. 또 다른 공통점은, 테세우스의 배 역설에 대한 전통적 답변들이 가지는 흑백논리를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즉 “같은 배인가 아닌가”라는 이분법 대신, 데리다는 동일성과 차이의 공존을, 퍼핏은 연속성과 실용적 중요성을, 데닛은 서사적 통일성을 강조함으로써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하려 합니다.
한편, 차이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접근 방식에서, 데리다는 언어와 개념 분석을 통해 정체성 개념 그 자체를 해체하려는 대륙철학(Continental) 전통에 서 있고, 퍼핏과 데닛은 논리적, 과학적 분석을 통해 구체적인 정체성 판단 기준을 모색하는 영미철학(Analytic) 맥락에 있습니다. 데리다는 테세우스의 배 문제를 직접 다루기보다는 그것이 보여주는 의미의 미끄러짐에 주목하여, '같음'이라는 의미가 시간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파고듭니다. 이에 비해 퍼핏은 이 역설을 논리적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에게는 “원래와 같은 배인가?”라는 질문은 유용하지 않고, 대신 *“얼마만큼의 원래 특성이 남아 있는가”*를 묻는 식으로 바꾸어 생각합니다 . 퍼핏의 논의는 주로 개인의 정체성(내가 계속 나인가)에 집중되어 있지만, 그의 통찰은 배와 같은 물체의 동일성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퍼핏이라면 “교체된 배와 재조립된 배 중 누가 진짜인가?”에 대해 둘 다 아니며, 다만 원래 배의 연속성이 두 갈래로 나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 데닛은 인공지능과 뇌과학의 사례들을 즐겨 들면서, 정체성 문제를 정보처리와 기능의 관점에서 봅니다. 데닛은 테세우스의 배를 “정보적으로 동일한 객체”로서 이해할 수 있다면 같은 배로 간주해도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즉 배의 디자인, 구조, 쓰임 등이 연속적이면 정체성은 유지된 것으로 보는 실용주의적 태도를 보일 것입니다. 요약하면, 데리다는 정체성 개념 자체를 해체하고, 퍼핏은 *정체성을 결정짓는 기준(심리적 연속성)*을 강조하며, 데닛은 정체성은 서사적/기능적 편의라고 여깁니다.
또한 철학적 배경의 차이도 있습니다. 데리다는 해체주의로부터 출발하여 이 역설을 존재론적/언어철학적 문제로 다루고, 퍼핏은 윤리학과 형이상학의 맥락에서 책임, 생존의 문제와 연결지어 해석합니다. 실제로 퍼핏은 정체성에 대한 입장이 윤리적 판단에 큰 함의를 지닌다고 보았는데,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과거의 범죄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동일인으로 벌해야 옳은가? 같은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한편 데닛은 인지과학과 인공두뇌학 등의 사례로부터 영감을 받아, 테세우스의 배 문제를 두뇌가 지속적인 자기 모델을 형성하는 방식과 연결시켰습니다. 이처럼 퍼핏과 데닛은 경험적 사례나 논리 실험을 통해 정체성의 조건을 모색한 반면, 데리다는 철학사적인 담론을 통해 정체성 개념의 모순을 드러낸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지속되는 논의와 현대적 확장
테세우스의 배 역설은 최신 철학 담론에서도 여전히 활발히 언급됩니다 . 데리다, 퍼핏, 데닛의 논의는 각기 독자적이지만, 이들의 통찰은 오늘날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과학기술 철학에서는 테세우스의 배 문제가 인공지능과 정체성 논의에 적용됩니다. 한 사람의 기억과 성격을 모두 컴퓨터로 업로드하여 똑같이 재현할 수 있다면, 그 디지털 복제물이 원래 사람과 동일한 인격인가? 하는 문제는 테세우스의 배의 현대적 변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아버지의 삶의 데이터를 모아 디지털로 부활시키려 시도하고 있는데, 철학자들은 이를 “가상 공간에서의 테세우스의 배”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논의는 퍼핏이 제기한 텔레포터 역설과 밀접하며, 데닛의 주장대로 정체성은 정보의 연속성에 불과한지를 묻고 있습니다. 한편 현대 형이상학자들은 4차원주의나 상대적 정체성 이론으로 이 역설을 공식적으로 다루기도 합니다. 가령, 데이비드 루이스 같은 4차원주의자는 테세우스의 배를 *시간에 걸쳐 펼쳐진 하나의 “시간-공간 벌레”*로 보고, 교체된 배와 재조립된 배는 처음에는 겹치다가 나중에 갈라지는 분기된 시간 조각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이론적 해법들은 퍼핏과 맥을 같이하는데, 정체성을 일대일 대응 관계로 보지 않고 분기 가능하거나 상대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결론적으로, 테세우스의 배 역설은 “무엇이 동일성을 구성하는가?”라는 난제를 던지며, 데리다, 퍼핏, 데닛은 각자의 철학적 배경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데리다는 해체주의적 통찰로 정체성 개념의 불안정성을 부각했고, 퍼핏은 개인 동일성 문제를 통해 심리적 연속성이 정체성의 핵심임을 주장했으며, 데닛은 인지과학을 토대로 정체성은 우리의 두뇌가 짜는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세 접근법은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전통적인 본질주의적 정체성 관념을 넘어서려 한다는 점에서 맥을 같이합니다. 테세우스의 배에 관한 이 철학적 논의들은 오늘날 자기(identity)를 이해하는 방식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나 자신이나 우리의 사회적 정체성이 변화 속에서도 어떻게 유지되는지에 대한 사유를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